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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 청와대 관람과 서울 육상궁

불루마운틴 2015. 1. 22. 15:57

청와대 관람과 서울 육상궁(사적 149호)                                     written by 서울 문화유산 답사

인왕산 주변의 문화유산 답사 코스는 사직단에서부터 연희궁지까지 소개를 했으며,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경복궁 개인 답사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코스가 어딘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서 칠궁(육상궁) 답사 코스에 추가해 보았습니다만, 청와대 관람을 통해서만 칠궁을 둘러 볼 수 있습니다.

 ▲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 경북궁 전경

 ▲ 봉인사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

연희궁지에서 경복궁 방향으로 건너오면 주변에 제자리를 떠나 온 많은 부도나 탑들이 즐비했으나 용산 국립중앙 박물관이 개관되면서 그 곳으로 모두 옮겨 가고 이제는 국보 101호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만이 홀로 쓸쓸히 남아 았습니다. 그 이유는 광나루의 '남한강 유역의 폐사지 답사' 내용을 보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우측에는 보물 928호인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가 있으며, 이 사리탑은 주변에 난간을 두른 것과 모양이 보물 388호인 회암사지 부도와 흡사합니다. 주차장 있는 곳에서 청와대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는 곳이 있습니다. 부스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본인 여부를 확인하고 시간이 되면 경복궁 뒤에 위치한 청와대로 출발합니다.

 ▲ 청와대 녹지원

 ▲ 청와대 본관

 ▲ 청와대 영빈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칠궁(육상궁)은 가 보려고 몇 년째 벼르고 있다가 2006년 6월에서야 다녀 왔습니다. 청와대는 가 보고 싶지 않아도 칠궁을 가려면 청와대 관람을 어쩔 수 없이 신청해야 합니다.

 

인터넷 사이트(http://www.president.go.kr/cwd/kr/viewing/reserve_step1.php?date_y=2007&date_m=2)에서 최소 2주 전에 신청을 해야하며 4~5개월 전에도 가능합니다. 관람일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이며, 매월 4주 토요일에도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10월 25일자 신문 기사를 보면 "참여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를 찾은 관람객이 25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100만명의 관람객을 맞은 청와대는 지난 3년 8개월 동안, 하루 평균 750여명, 월 평균 2만2,700여명이 다녀갔다. 청와대 방문 대상을 전면 개방한 지난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 포함할 경우 총 228만 6434명이다."

청와대 관람을 마치고 위 사진의 좌측으로 나와서 담장을 끼고 조금 올라 가면 아래 좌측 사진의 칠궁 외삼문이 보이며, 우측으로 돌아서 중간 사진의 솟을대문으로 들어 갑니다.

 ▲ 칠궁 외삼문

 ▲ 칠궁 입구

 ▲ 안에서 바라 본 칠궁 입구 전경

칠궁을 들어서면 아래 좌측 사진의 송죽재가 보이며 칠궁을 둘러보고 맨 뒤에 돌아 나오다 보면 맨 위의 사진 처럼 송죽재 뒤편은 삼락당으로 ㄱㄴ자 형으로 붙어 있습니다.

 ▲ 송죽재

 ▲ 칠궁 삼문

 ▲ 칠궁 내삼문

송죽재 좌측으로 나가면 위 중앙 사진처럼 칠궁의 내삼문이 보이며, 내삼문을 지나면 다시 삼문이 보입니다. 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덕안궁 건물이 있으며, 뒤편으로 3개의 건물이 나란히 있습니다.

 ▲ 덕안궁 전경

 ▲ 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 전경

맨 좌측에 있는 건물이 저경궁이고 ,중앙 건물이 대빈궁이며, 우측 건물은 선희궁과 경우궁의 신위가 합사된 건물입니다. 건물은 넷 채지만 다섯 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인왕산 코스의 마지막으로 보셨던 선희궁지에 있던 신위가 이 곳으로 합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저경궁 전경

 ▲ 대빈궁(장희빈) 전경

 ▲ 선희궁/경우궁 전경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으로 영왕을 낳은 순헌 귀비 엄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광무 원년(1897)에 엄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경운궁 안에 거처할 궁을 세워 그 궁을 경선궁이라 불렀고, 엄귀비가 세상을 떠나자 덕안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육상궁 안으로 옮겨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의 칭호를 받았다. 인빈이 세상을 떠난 후 원종이 살던 송현궁에 신위를 모시고 저경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저경궁은 고종 7년(1870)에 계동에 있는 경우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빈궁(大嬪宮)은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숙종 27년(1701)에 희빈이 사망한 후 신위를 정동에 있는 집에 모셨다가 경종 2년(1722)에 희빈에게 옥산대부인의 칭호를 내리면서 사당을 현재의 교동인 경행방에 세웠다. 대빈궁은 고종 7년(1870)에 다시 돌아갔고,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우궁(景祐宮)은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 해 신주를 창경궁 안에 모시고 현사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현재의 종로구 계동의 양덕방에 따로 묘를 세우고 이름을 경우궁으로 지어 신주를 모셨다. 이후 이 궁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현재의 옥인동인 인왕동으로 옮겨 졌다가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냉천정

 ▲ 냉천장 앞의 연못

 ▲ 紫淵(자연)이라 쓰인 각자

다섯 분의 신위를 모신 건물을 둘러보고 우측으로 가면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하던 냉천정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뒤편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또한 냉천정 앞에는 석축을 두른 자연(紫淵)이라는 정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으며, 정면 석축 한 가운데는 紫淵이라 새겨진 글씨가 있습니다.

 

냉천정을 지나서 우측 영역으로 들어가면 건물은 한 채가 있으나 연호궁과 육상궁이 합사되어 있습니다. 앞의 현판은 연호궁으로 걸려 있으나 안쪽에는 영조의 친필로 쓰인 육상묘(毓祥廟)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칠궁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청와대 방향으로 사진을 찍으면 뭐라고 합니다. 칠궁 관람 내내 주변 어딘가에서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 중문

 ▲ 연호궁

 ▲ 육상묘 현판(영조의 친필)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며, 죽은 후, 왕의 칭호를 받은 진종을 낳은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궁이다. 진종은 정빈에게서 태어나 세자로 정해졌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즉위 후, 진종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정빈을 위해 정조 2년(1778)에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연호궁이라 이름 지었다. 연호궁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왼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육상궁 안내도

육상궁 위치도

소재지 : 종로구 궁정동 1-1

 

아래의 빨간 깃발이 잇는 곳이 청와대 관람을 위한 버스를 타는 곳입니다.

 

위의 빨간 깃발이 칠궁이라 불리우는 육상궁입니다.

 

본 답사에서는 청와대 관람을 미리 신청하지 못하신 분들은 경복궁을 둘러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서울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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