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담기

[스크랩] [1] 서울 동묘

불루마운틴 2015. 1. 22. 15:52

서울 동묘(보물 142호)                                                                       written by 서울 문화유산 답사

우리가 흔히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지문 주변의 문화유산들을 돌아보겠습니다. 흥인지문 주변의 문화 유산은 서울 동묘에서부터 시작하며, 서울 성곽을 따라서 내려오면서 흥인지문에서 답사를 끝마치게 됩니다.

 

동묘는 이미 소개드린 장충동의 관성묘, 방산동의 성제묘와 같이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서울 동묘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1970년대 초에 이르러 그 경내외가 너무나 지저분하고 무질서하다는 여론이 있어 서울시가 주변 정화에 나서 1973년 4월 4일자로 동묘공원으로 하고 유료 공원으로서 관리하다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지금은 무료 입장입니다.

▲ 동묘 정문 주변 전경(2004년)

▲ 정문 좌측 비석

▲ 동묘 정문 안쪽 모습

2~30십년 전부터 종묘 담장 앞에서 버스도 갈아타고 많이도 지나 다니면서도 이 곳이 동묘인줄은 몰랐으나 문화유산 답사를 다니다 보니 여러 차례 가 보게 되었습니다.

 

2003년 3월의 동묘 주변은 인적이 드물어서 황량할 정도로 썰렁했으나 2004년 3월의 동묘 주변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2006년인 지금은 황학동 도깨비 시장이 이 곳으로 다 몰린 듯 합니다.

▲ 동물상(정문 우측)

▲ 석조물(정문 좌측)

▲ 하마비

▲ 금잡인

2003년 처음 방문했들 때는 몇 몇 어르신들이 담소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 이었으나 지금은 동묘 주변이 활기를 뛰다보니 동묘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는 관리사무소가 있으며, 구멍이 뚫린 작은 석조물이 하나 있는데 용도가 무었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오른쪽에는 낮은 계단 위로 건물이 있었던 자리 같은데, 지금은 좁은 단 위에 터만 남아 있고, 뒤에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계단 양 옆에는 중국풍의 동물 조각상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습니다.

▲ 동관묘 입구에서 바라 본 2003년 사진(좌측)과 2004년 사진(우측)을 보니 뒤편에 높은 건물이 들어 섰네요.

정문 정면에는 관왕묘를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이 하나 서 있으며, 좌측에는 하마비가, 우측에는 금잡인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습니다. 금잡인이라... 지금 같은면 잡상인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긴데... 사전을 찾아 보니 "(특정한 곳에서) 관계없는 사람의 출입을 금함" 이더군요.

 

관왕묘 입구의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관왕묘의 큰 건물이 보이고, 좌측과 우측 끝에도 긴 건물이 있습니다. 좌측 건물 안의 한 쪽에는 비석이 서 있으며, 우측 건물 안에는 사찰에 있는 법고 같은 큰 북과 긴 창검들이 있습니다. 이 좌우의 건물은 아마도 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 같았습니다.

▲ 관왕묘 입구 좌측 건물

▲ 관왕묘 건물 전경

▲ 관왕묘 입구 우측 건물

관왕묘 앞에는 석등인 것 같은 석조물이 몇 점 있으며, 건물 정면은 나무 창살로 되어 있어서 안을 들여 다 볼 수 있습니다. 내부 중앙은 비어 있으며, 내부 안쪽으로는 여러 개의 방이 있더군요. 각 방 위에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안에는 목조상이 있고, 관우상은 맨 오른편에 모셔져 있습니다.

 

관왕묘 건물 좌우 뒤편으로는 붉은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기둥마다에는 긴 한문이 쓰여있는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또한, 천장 모서리 좌우로는 현판들이 무수히 많이 걸려 있었습니다. 관왕묘 지붕 몇 곳은 기와가 깨져 있거나 떨어져 있어서 일부 보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 관왕묘 앞의 석조물(석등)

▼ 관왕묘 앞면 전경

▼ 관왕묘 내부의 관우상

서울 동묘(서울 東廟)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1601년에 완성되었으며,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 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입니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으며,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익공계 양식입니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며,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기둥과 천장에 수많이 걸려있는 주련과 현판들

▲ 동묘 건물 뒷면

동묘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동묘에 대한 논란이 있어서 옮겨 보았습니다.

 

[여론마당]조용구/민족 자존심 해치는 관우 숭배 [동아일보 2001-08-14]

 

임진왜란에서 큰공을 세워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도원수 권율을 비롯한 위대한 선조들의 사당 한 채 번듯이 못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 외국 군인을 숭배하고 있는 전국 각지의 관왕묘(동관왕묘, 남관왕묘 등)는 하루속히 철거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조용구(배명중학교 이사장)

 

[독자편지]남재우/관우 제사에 국민 세금 쓰다니 [동아일보 2001-08-06 18:23]

 

서울 종로구 숭인동 대로변에는 약 3000평의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동묘(東廟)’라는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였던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 우리 민족과 국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약 1800년 전 중국의 한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에게 우리의모습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관우는 패장(敗將)으로서 그의 조국인 중국에서도 그를 기리는 공공행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 잔재의 청산과 아울러 부질없는 중화 문화의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재우(서울 동작구 상도동)

 

문화재청 관계자의 답변은...

 

‘여론마당’에 실린 ‘민족 자존심 해치는 관우 숭배’를읽고 쓴다. 동묘가 명나라의 압력으로 건립된 것이라면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조선이 왜 이를 철거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조선은 오랑캐 나라인 청에게 군사적으로 굴복했지만 문화적, 정신적으로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동묘를 보존했던 것이다. 또한, 현재의 가치관과 다르다고 해서 ‘하루 속히 철거돼야 한다’면 우리 주변의 문화재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문화재는 철거는 쉽지만 보존은 어렵다. [동아일보 2001-08-17]
연 갑 수(서울시청 문화재과 문화재관리팀장)

 

☞ 현재, 우리나라 문화재 중에 외국에서 들여 온 것도 보물로 지정된 것이 몇 점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남     의 나라 문화재도 약탈해서 자기들 문화재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치욕의 역사에 대한     산물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라도 보존은 해야 할 것이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동묘공원 위치도

소재지 : 종로구 숭인동 238-1

 

빨간 깃발이 있는 곳이 동묘 공원의 정문입니다.

 

지하철 1, 6호선 동묘앞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정면에 동묘 담장이 보입니다.

 

담장으로 끼고 우측 골목으로 100여 미터 들어가서 좌측 골목으로 꺽어지면 동묘 정문이 보입니다.

동대문 주변 문화유산 답사 코스 동선 및 전체 위치도

빨간 깃발들이 답사지이며, 시발점인 동묘에서부터 답사지 순서대로 흥인지문까지 동선으로 연결해 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서울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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