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언제부터 ‘국보 1호’ 숭례문이 시민들로부터 멀어졌을까?
서울시 중구는 지난 3일 숭례문 중앙통로(홍예문)을 개방하면서 “99년만에 문이 열렸다”고 밝혔다. 1907년 일본 통감부가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전찻길을 내면서 숭례문이 도로로 둘러싸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사진과 문헌을 종합해보니, 실제로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상태로 고립된 것은 60년대부터였다.
서울시가 2002년 펴낸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서울>(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엮음)엔 1910~45년 사이에 숭례문 일대 거리 풍경(사진)이 실려있다. 이 사진은 성벽이 헐려 문루만 덩그렇게 놓인 가운데 문 서쪽엔 전찻길이 복선으로 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숭례문 중앙통로를 지나다니고 있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연구간사는 “1907~08년에 성곽을 헐고 문루 좌우에 새 도로를 낸 것은 맞지만 당시엔 노면전차가 숭례문 부근에서 정차했으며 사람들의 통행도 제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종로~남대문 구간에 전차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것은 1899년. 당시엔 아직 서울성곽이 헐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도 사람·우마와 함께 숭례문 중앙통로를 지나다녔다. 그러나 통감부는 1907~8년 전차 운행이 불편하고 교통이 혼잡하다는 이유로 문루 좌우 성벽을 헐어 폭 8간의 새길을 낸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시구개수예정노선’을 발표해 황토현네거리(광화문네거리)~대한문앞 광장(시청앞 광장)~남대문에 이르는 노선을 너비 15간(27~30m), 남대문~한국은행~종로를 너비 15간(27~30m)으로 확장하도록 했다. 당시 간선도로의 전차 노선엔 일부 아스팔트 포장이 돼 있었다. 길은 넓어졌지만 사람들은 전찻길을 가로질러 숭례문을 드나들었다.
숭례문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섬’으로 변한 것은 전찻길이 사라지고 자동차가 증가한 1960년 말부터였다. 1966년 4월 김현옥씨는 서울시장에 취임하자마자 노면 전차를 모두 철거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속도가 느리고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이에 1968년 11월 서울시내엔 전차 운행이 모두 정지되고 전찻길은 모두 자동찻길로 변한다. 반면 자동차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에 1만1533대, 1965년엔 1만6624대에서 1970년엔 6만422대로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손영식 전통건축연구소장(문화재 전문위원)은 “숭례문의 홍예문이 언제 폐쇄됐는지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지만 ‘국보 1호’로 지정된데다(1962년), 자동차 도로에 갇혀 접근이 불가능해지니 관리가 어려워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