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담기

[스크랩] [08] 서울 숭례문

불루마운틴 2015. 1. 22. 15:43

서울 숭례문(국보 1호)                                                                        written by 서울 문화유산 답사

 ▲ 2005년 이후의 개방된 숭례문 전경

구 제일은행 본점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500여 미터 내려오면 우리들이 흔히, 남대문이라 부르는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다른 문화재로 국보 1호를 바꾸자느니 마느니 한참 논란도 있었습니다.

 ▲ 2005년 이전의 고립된 숭례문 전경

그 동안 숭레문은 고립된 섬처럼 로터리의 중심에 있었으나 몇 년 전에는 숭례문 우측에 작은 공원을 만들어서 남대문을 조망하게 하였으며, 2005년에는 숭례문 우측 도로를 메우고 광장을 조성하여 관람객들이 숭례문을 바로 앞에서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어서 2006년부터는 99년만에 숭례문을 개방한다고 크게 신문에 났었으나, 아래의 기사를 보면 그렇지도 않군요. 99년만이든 50년만이든 어쨌거나 숭례문 중앙 통로를 개방을 해서 가까이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 활짝 문 열린 숭례문

 ▲ 숭례문을 들어서며...

 ▲ 숭례문의 철문

숭례문 개방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숭례문의 중앙통로인 홍예문(虹霓門, 문틀 윗머리가 무지개 모양으로 된 문)을 따라 숭례문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층의 문루(門樓)는 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하여 개방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숭례문 관람과 더불어 서울시가 2005년 7월 6일부터 숭례문 광장에서 내·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매일 오전10시∼오후4시 사이 3명의 파수꾼을 30분마다 교대 배치하는 조선시대 도성문 파수(把守) 의식 재현 행사 관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06년 2월7일부터 매일 오전10시30분, 오후1시30분, 오후3시에 열리고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장과 숭례문 광장의 파수의식 행사장을 오가는 '순라(巡邏)의식'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 1.6m 아래의 석축의 지대석

 ▲ 숭례문의 원형 바닥 설명문을...

 ▲ 숭례문 반대편 전경

숭례문은 지금보다 1.6m 가량 더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중구청은 2005년 10월부터 1억7000만원을 들여 통로 보수공사와 홍예문 입구 등 5곳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 조선 세종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랫부분 석축 기단과 지대석(맨 아래 기초석), 박석(바닥에 까는 돌), 문지도리(문을 다는 돌 구조물) 등을 발굴했으며, 숭례문 중앙통로에 관람용 트렌치 2개소를 설치하여 현재의 지반보다 1.6미터 밑에 있는 문지도리석과 지대석, 박석 유구를 시민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홍예문은 원래 문짝의 3분의 1 정도가 묻혀 있었으며 다른 곳에서도 기단 석축과 박석이 원형에 가깝게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묻힌 부분을 모두 합하면 숭례문은 높이가 현재의 12.3미터에서 13.9미터로, 홍예문은 4.37미터에서 5.97미터로 크게 올라간다고 하며, 1907년께 남대문을 관통하는 전차선로를 내면서 문 주위로 흙을 1미터 가량 쌓아올려 아래 쪽 기단과 박석들이 완전히 묻힌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 동안 숭례문은 고립된 섬에 있는 것 처럼 로터리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멀리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전에는 우측 언덕을 분수대가 있는 소공원으로 조성하고 포토 아일랜드를 만들어 놓아서 그나마 숭례문을 보거나 사진 찍기가 다소 수월해 졌었습니다.

 

드디어 2005년 6월에는 숭례문 오른쪽 차도를 없애고 2500평 규모의 광장을 만들었으며, 2006년 3월부터는 숭례문 안으로 들어가서 뒤로 돌아 나올 수 있도록 중앙 통로만 개방하였습니다.

 

숭례문 중앙 통로 개방 시간은...
평일 : 10:00~17:00
토, 일, 공휴일 : 10:00~16:00
화요일 : 정기 휴일

 ▲ 숭례문 앞에 조성된 광장 조감도 사진

아래 사진과 같이 숭례문(崇禮門)은 현판 글씨가 다른 건물 현판과 달리 세로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양 도성내의 화재를예방하기 위해 세로로 작성됐다고 하며, 한양을 바로 보고 서 있는 관악산이 '화(火)의 산'이기에 현판을 세로로 세워 놓아야 관악산 화기와 맞불을 놓는 격이 되고, 이에 따라 관악산에서시작된 화기(火氣)는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숭례문 밖에서 기운이가시게 된다는 말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공포와

편액

서울 숭례문(서울 崇禮門)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하며,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입니다. 1996년 말에 국보 제1호 '서울 남대문'의 공식 지정 명칭이 '서울 숭례문(崇禮門)'으로 바뀌었다.

 ▲ 귀공포와 추녀

 ▲ 숭례문 천장

우표로 보는 숭례문

1900년 전후의 숭례문 사진

99년만의 개방? 숭례문, 50년전에도 사람들 다녔다.
[한겨레 2006-03-14 20:24]

[한겨레]


언제부터 ‘국보 1호’ 숭례문이 시민들로부터 멀어졌을까?

 

서울시 중구는 지난 3일 숭례문 중앙통로(홍예문)을 개방하면서 “99년만에 문이 열렸다”고 밝혔다. 1907년 일본 통감부가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전찻길을 내면서 숭례문이 도로로 둘러싸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사진과 문헌을 종합해보니, 실제로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상태로 고립된 것은 60년대부터였다.

 

서울시가 2002년 펴낸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서울>(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엮음)엔 1910~45년 사이에 숭례문 일대 거리 풍경(사진)이 실려있다. 이 사진은 성벽이 헐려 문루만 덩그렇게 놓인 가운데 문 서쪽엔 전찻길이 복선으로 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숭례문 중앙통로를 지나다니고 있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연구간사는 “1907~08년에 성곽을 헐고 문루 좌우에 새 도로를 낸 것은 맞지만 당시엔 노면전차가 숭례문 부근에서 정차했으며 사람들의 통행도 제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종로~남대문 구간에 전차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것은 1899년. 당시엔 아직 서울성곽이 헐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도 사람·우마와 함께 숭례문 중앙통로를 지나다녔다. 그러나 통감부는 1907~8년 전차 운행이 불편하고 교통이 혼잡하다는 이유로 문루 좌우 성벽을 헐어 폭 8간의 새길을 낸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시구개수예정노선’을 발표해 황토현네거리(광화문네거리)~대한문앞 광장(시청앞 광장)~남대문에 이르는 노선을 너비 15간(27~30m), 남대문~한국은행~종로를 너비 15간(27~30m)으로 확장하도록 했다. 당시 간선도로의 전차 노선엔 일부 아스팔트 포장이 돼 있었다. 길은 넓어졌지만 사람들은 전찻길을 가로질러 숭례문을 드나들었다.

 

숭례문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섬’으로 변한 것은 전찻길이 사라지고 자동차가 증가한 1960년 말부터였다. 1966년 4월 김현옥씨는 서울시장에 취임하자마자 노면 전차를 모두 철거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속도가 느리고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이에 1968년 11월 서울시내엔 전차 운행이 모두 정지되고 전찻길은 모두 자동찻길로 변한다. 반면 자동차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에 1만1533대, 1965년엔 1만6624대에서 1970년엔 6만422대로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손영식 전통건축연구소장(문화재 전문위원)은 “숭례문의 홍예문이 언제 폐쇄됐는지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지만 ‘국보 1호’로 지정된데다(1962년), 자동차 도로에 갇혀 접근이 불가능해지니 관리가 어려워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

<대한민국 국보 제1호는 일본의 승전 기념물> 
[연합뉴스 2003-09-02 15:09]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이 해체된 돈화문과 달리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건축물이 일본의 조선침략 승전 상징물이기 때문이었다는 한 일본인 학자의 최근 연구성과는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1호와 보물 제1호로서 대한민국 문화재의 대표격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팔만대장경 같은 역사적 미술사적 건축사적 의의가 더욱 큰 유적 유물도 많은데 왜 남대문과 동대문이 국보와 보물 제1호를 차지해야 하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이미 지난 96년에 엄청난 논란을 유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문화재관리국과 학계 일부에서는 국보나 보물에 매기는 번호가 문화재의 가치를 매기는 우열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리번호이며 번호 교체에 따른 행정력 낭비 등을 들어 기존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인 오타 히데하루 일본 도후쿠(東北)대 특별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일제시대 성곽 건축물 관리정책에 대한 연구성과는 96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논쟁을 유발할 전망이다.

오타씨 연구에 따르면 1904-1905년 당시 대한제국을 좌지우지한 일본 제국주의가 추진한 경성 일대 도시계획에 의해 남대문과 동대문은 교통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 혹은 이전이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두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600)가 각기 이들 문을 통해 왕성에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자랑스런 기념물이라 해서 보존된 것으로 오타씨 연구에 의해 드러났다.

 

반면 서대문(돈화문) 등 다른 성곽은 일본침략과 관련된 역사성을 갖추지 못해 완전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오타씨 연구에 의하면 일본과 관련한 역사성을 기준으로 한 유적. 유물의 해체및 이전 정책은 평양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즉, 평양의 경우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은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

 

오타씨는 "이런 (평양성) 성문들은 문화재적 가치보다는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근대사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부여됐다"고 평가했다. 일제의 한국 문화재 정책이야 그렇다고 치고 더욱 큰 문제는 해방 뒤 남한과 북한의 문화재 정책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 혹은 청국을 상대로 전승한 기념물이라 해서 보존되고 고적으로까지 지정된 이들 일제시대 문화재가 해방 뒤 남한과 북한에서 나란히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각각 대표하는 문화재로 고스란히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이 일제가 지정한 고적 제1호라는 사실은 그냥 보아 넘기기가 힘들다. 북한 또한 청일전쟁에서 '대일본제국' 군대가 승리한 기념물이라고 해서 보존한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지가 고스란히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들 유적을 포괄하고 있는 평양성이 바로 북한의 국보 제1호이며 보통문은 2호이다.

 

물론 남대문이나 동대문, 을밀대 등이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각기 건축사적.미술사적.역사적 의미로 볼 때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일제가 왜 이런 유적들을 고적으로 지정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철저한 연구나 성찰이 없었다는 점은 큰 문제이다.

 

일제가 임진왜란의 자랑스런 승전물이라 해서 보존하고 이를 토대로 고적 제1호로 지정 고시한 남대문을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 명칭만 바꿔 문패를 바꿔 단 것은 그토록 친일잔재 청산을 외쳐온 대한민국의 오욕이라 할 것이다.

기사제공 :

숭례문 위치도

소재지 : 중구 남대문로4가 29

 

빨간 깃발이 있는 곳이 숭례문입니다.

 

구 제일은행 본점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500여 미터의 거리입니다.

출처 : 서울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