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지담기

[스크랩] 우리 문화재의 심층 탐구 2 ( 신라의 금관 )

불루마운틴 2015. 3. 3. 21:25

 

신라(新羅)의 금관(金冠)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자그마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는 장사가 무척 잘되자 주막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기 시작하자 고색창연한 황금빛 금관이 나왔는데, 이것이 1500여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금관총 금관으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저 금관총(金冠塚)이라 하였으며,

3년 뒤 역시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다가 두 번째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금관에 매달려있는 특이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무덤 이름을 금령총(金鈴塚)이라 지었으며,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 번째 금관이 나왔으며, 당시 스웨덴 왕세자의 신분으로 아시아 지역을 탐방하고 있던 고고학자 아돌프 6세가 마침 발굴 현장에 함께하였으며, 그의 이 뜻 깊은 발굴동참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의 첫 글자와 봉황(鳳凰)의 첫 글자를 따서 무덤을 서봉총’(瑞鳳塚)이라 이름 하였답니다.

그 후 1973년에 천마총(天馬塚) 및 1년 뒤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에서도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그 밖에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경주시 교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금관도 한 점 더 있습니다.

 

 

금관총(경주 노서동)

금령총(경주 노동동)

서봉총(경주 노서동)

천마총(경주 황남동)

황남대총(경주 황남동)

경주시 교동 64 폐고분군

 

모두가 왕릉 급 무덤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고 있으며, 학계의 추산으로는 경주 일원에 150여기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중 이미 발굴된 것은 약 30기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또 어떤 무덤에서 얼마만큼의 금관이 더 쏟아져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답니다 .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알려진 고대사회의 금관은 합해서 10점밖에 안되며, 그 중 신라금관 6점과 가야 금관 1점을, 그것도 가장 완벽한 것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올 것으로 예견한다면, 우리나라는 글자 그대로 ‘금관의 종주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학계는 금관과 전혀 상관없는 19세기 시베리아 샤먼의 철제 무관(巫冠)에서 금관이 기원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 무관에서 기원했다면, 시베리아 샤먼의 모자가 번쩍거리는 5세기의 금제 왕관이든지, 신라 금관이 19세기 이후의 소박한 철제 무관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는 참이어야 하는데도, 어느 것도 참일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듭하고 있고,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답니다.

최근에는 금관이 왕관이 아니라 조잡하게 만들어진 부장품으로서 주검의 얼굴을 가리는 데드마스크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금관이 머리에 쓰는 관모인지, 얼굴을 가리는 가면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결국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시베리아 무관을 본받은 것으로 해석하여 민족적 창조력을 부정할 뿐 아니라, 금관을 왕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한갓 조잡한 부장품으로 격하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러한 두 주장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들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금관총 금관

금령총 금관

서봉총 금관

천마총 금관

황남대총 금관

교동 금관

흑해 북안 출토 사르마트 금관 및 샤르바칸 틸리아 테페 금관

카자흐스탄이씩 고분금관 (우)

가야 금관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곳은 신라 1000년 역사 중에서도 김알지의 후예들인 김씨 마립간들이 통치하던 5~7세기 중반의 적석목곽분에서입이다.

 

나비모양 관 꾸미개(천마총)

세움 장식의 겉관(천마총)

절풍 양식의 속관(천마총)

 

  

신라 금관은 세움 장식을 갖춘 겉관과 절풍 양식인 속관의 이중구조로,

절풍양식의 속관은 고조선 이래 우리 관모사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세움 장식의 겉관은 단군 신화의 신단수(神檀樹)와 같은 성수(聖樹)인 신라초기 김알지 신화에 등장하는 계림(鷄林)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창조된 것 입이다.

 



 

 경주 계림


일부 신라의 금관( 또는 금동관 )의 경우 세 그루의 성수 ( ; 森 ; 나무 세그루 )로 장식된 금관도 있으나,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금관들은 한결같이 다섯 그루의 성수 ( 삼림 ; 森林 ; 나무 다섯 그루 )로 장식되어 있으며, 거대한 삼림으로 구성된 신성한 계림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신성한 성수(聖樹)이기에 모두 금빛 찬란하게 반짝이며, 진정한 성수는 생명력이 있는 살아있는 나무여야, 아기(알지)와 같은 영웅을 출현시킬 수 있으며, 천계와 같은 신성한 닭도 깃들 수 있겠습니다.

 

 

금관 세움장식

형태

기본형

곧은 줄기

곧은 가지

가지변이형

곧은 줄기

굽은 가지

줄기변이형

굽은 줄기

곧은 가지

신라 금관

변화 양상

기본형 금관

3그루의

곧은 줄기,

곧은 가지로

형상화

발전형 금관

3그루의

곧은 줄기,

굽은 가지로

형상화

완성형 금관

3그루의 곧은 줄기

굽은 가지에,

2그루의 굽은 줄기

곧은 가지로 형상화

 

 

 

 

 

교동 금관

( 기본형 금관 )

 

금령총 금관

( 완성형 금관 )

보물338호

천마총 금관

( 완성형 금관 )

국보188호

금관총 금관

(완성형 금관 )

국보87호

서봉총 금관

( 완성형 금관)

보물339호

『서봉총=진평왕릉으로 比定

상명여대 박선희 교수

 

황남대총 금관

( 완성형 금관 )

국보191호

황남대총=진덕여왕릉으로 推定』- 마지막 금관

 

 

그러므로 금관의 세움장식을 하고 있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나뭇잎을 상징하는 영락 (瓔珞)이 달려있을 뿐 아니라, 가지 끝마다 생명을 상징하는 ♤모양의 ´움 (새순)´이 봉긋하게 돋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조속 ( 1595 ~ 1668 ) 의 계림 고사도


 

따라서 신라의 금관은 신라 김씨 왕조의 신성성과 계림국의 정체성을 왕관으로 형상화한 시각적 도구로써, 계림을 상징하는 신성한 나무들과 나뭇잎, 금궤 안의 아기 즉 새 생명체를 상징하는 곡옥(교동 및 금령총 금관 제외-소아용), 천계의 등장을 나타내는 수탉 (서봉총 금관) 등이 일목요연하게 형상화되어 있는 알지 신화의 조형적 상징물이라 해석되어 집니다.

 

신라 금관의 기원과 김알지 신화의 상징』이란 제목으로 신라문화원 강당(2008.8.20) 및 경주문화원 강당(2010.6.24)에서신라 문화유산 해설사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안동대학교 임재해 교수의 강연 초록 중에서 주로 일부 내용을 빌췌, 편집, 자료 보완을 시행한 내용입니다.



은합 겉면 바닥에 새겨진 `연수원년태세재신`(延壽元年太歲在辛)을 해석한 결과 연수(延壽)는 고창국(高昌國)의 연호라는 사실과 연수원년은 고창국 국문태(麴文泰) 왕이 즉위한지 5년이 되는 해에 연호를 중광(重光)에서 연수(延壽)로 바꾼 원년에 해당되고, 즉 연수원년은 고창국 국문태왕 5년으로 서기 624년입니다. 그리고 `태세재신`(太歲在辛)은 덕(德)이 있어 많은 것을 이룬 명군(明君)이 계속하여 재위했다는 뜻으로, 따라서 이 명문은 고창국에서 연수원년에 국문태 왕이 계속 명철한 성군으로 재위하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기록이라 하겠습니다.



 

 


 경주 서봉총 부장품인 은합우

 은합우 뚜껑 내면의 명문


   또한 은합 덮개 안쪽에 새겨진 명문인 `연수원년태세재묘3월중(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은 국문태 왕이 즉위한지 5년 되는 연수원년은 만물이 무성하기 시작하는 3월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즉 연수원년에 고창국의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어 번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명문의 해석 내용으로 보아, 서봉총 은합우는 서기 624년에 고창국에서 만들어져 신라에 예물로 보내진 것이라 추정됩니다.

따라서 고창국에서 연수원년에 은합우(銀盒杅)를 만들어 신라에 전했다면 은합우가 묻혀있는 무덤은 적어도 624년 이후의 왕릉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시기의 신라왕은 579-632년 까지 재위한 진평왕으로, 은합우를 받은 수년 후 진평왕이 죽게 되자, 자연스레 은합우는 부장품으로 왕릉에 묻히게 되었고, 주인을 알 수 없어 서봉총이라고 일컬었던 고분은 진평왕릉(眞平王陵)일 수 밖에 없겠습니다.



 


 

 노서동 고분군 ( 서봉총 - 130호 분 )

  경주 서봉총 전경


; 고창(高昌)은 고대 실크로드 도시로 중국의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주변에 건설되었으며, 고창고성(高昌固城)은 499년 전한(前漢) 출신인 국가(麴嘉)가 세운 고창국의 왕성으로 투루판 시 남동쪽 46km 떨어진 곳에 화염산(火焰山) 기슭에 있습니다.

 


 


 


  중국 지도 ( 신장 위구르자치구 - 좌북단 위치함 )

  고창 고성 ( 화엄산 기슭에 자리함 )


한국 고대 복식 -그 원형과 정체, 박선희(朴仙姬), 지식산업사, 2002년에서 다룬

`은합우 명문의 재검토에 따른 서봉총 금관의 주체 해명` 내용 중 일부 발췌분-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systemengineerj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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